최근 법원의 기류가 이상합니다. 판결의 흐름이 바뀌고 있습니다.불행하게도 긍정적인 변화는 아닙니다. 오히려 범죄 피해자들의 숨통은 조이고, 가해자들은 ‘만세’를 부르는 형국입니다. 이른바 ‘천대엽 판결’ 이후 법원의 성범죄 사건 판결 양상이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부정하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뉴스레터는 해당 판결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성범죄 무죄 선고 통로 열어준 ‘천대엽 판결’
지난 1월 4일 천대엽 대법관이 주심을 맡은 대법원 2부는 한 자폐 남성의 성추행 사건을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 했습니다. 재판부는 피고의 행위가 장애로 인한 강박∙상동행동일 수 있다고 봤어요.
*상동행동: 몸을 앞뒤로 흔들거나 손을 계속 움직이는 등 목적 없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행동.
논란의 시발점은 판결문입니다. 이 사건 판결문에서 재판부는 2018년 박정화 대법관의 ‘성인지감수성 판결’에 제동을 걸었습니다. 앞서 박 당시 대법관은 “성범죄 사건을 심리할 때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감수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며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특별한 이유 없이 함부로 배척해선 안 된다”고 판결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올해 재판에서 대법원은 2018년 박 대법관의 판례를 두고 “(해당 판결이) 성범죄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제한 없이 인정해야 한다거나 그에 따라 해당 공소사실을 무조건 유죄로 판단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고 언급했습니다. 2018년 박 대법관이 폭넓게 받아들였던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축소할 여지를 열어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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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대엽 판결'이 성범죄 사건 판결의 향배를 뒤바꾸고 있다. 출처: 중앙일보
좀 더 상세하게 파고 들어보겠습니다. 이 사건은 피고인의 추행에 고의성이 있었느냐가 쟁점이었어요. 2024년 대법원은 피고의 행동이 장애로 인한 ‘증상적 발현’일 뿐 고의성이 없다고 보고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을 결정한 것이고요. 판결의 근거 자체가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 여부와는 무관했다는 얘기입니다.
그럼에도 이번 대법원 재판부는 2018년 판례를 언급하며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제한적으로 적용해야 한다’는 취지의 판단을 덧붙였습니다. 이를 두고 “하급심에서 성범죄 무죄를 선고할 때 인용할 수 있는 대법원 판례가 생겼다는 것이 우려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죠.
‘천대엽 판결’의 기저에는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억울한 피고를 만들지 않기 위해 무죄추정의 원칙을 수호해야 한다는 법관의 의식이 자리하고 있다는 분석입니다. 하지만 법조계 일각에서는 “재판부가 쟁점과 관련 없는 내용을 판결문에 끼워팔기한 의도적 설시(판결을 내리기 위한 원칙)”라는 비판도 나옵니다. 사실 ‘천대엽 판결’ 자체는 피해자 진술을 인정하되 무죄 주장을 배척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한 것이라서, 굳이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거론할 이유가 없었거든요.
'천대엽 판결' 이후 해당 판결을 인용해 무죄를 선고하는 성범죄 재판이 늘었다. 출처: 중앙일보
재판부의 의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후폭풍은 엄청납니다. ‘천대엽 판결’ 이후 두 달새 이 판결을 인용한 1ㆍ2심 판결이 27건 있었는데, 모두 무죄를 선고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중 25건은 강간·준강간을 포함한 성범죄 사건이었습니다. 1심에서 징역 3~6년의 실형을 선고한 성폭행 사건을 2심에서 ‘천대엽 판결’을 인용해 무죄로 뒤집은 사건도 5건이 나왔습니다.
주목할 점은 ‘천대엽 판결’ 중 하급심에서 집중적으로 인용된 대목을 살펴보면 모두 “피해자의 진술을 믿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는 취지를 담은 내용이란 사실입니다.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판사의 주관적인 법리 해석이 따라 판단하는 만큼, ‘천대엽 판결’이 성범죄 무죄 선고의 명분을 늘려줬다는 사실이 실증적으로 나타난 셈이죠. 결과적으로 성범죄 피해자들 앞에 놓인 ‘범죄피해 입증’이란 장벽은 더욱 높아진 것이고요.
'천대엽 판결' 중 하급심에서 집중적으로 인용한 대목들. 출처: 중앙일보
가해자에게 유리한 판결만 문제가 아니야... 법원 공정성 떨어뜨리는 요소 ‘수두룩’
피해자가 오롯이 범죄피해를 입증해야 하는 사법 환경에서 그 문턱을 한층 더 올린 ‘천대엽 판결’에 기가 막힌 독자님들이 많으실 겁니다. 더 심각한 건 가해자 중심 판결뿐만 아니라 법원과 재판의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각종 폐단이 수두룩하다는 거예요. 그중 대표적인 두 가지를 추려봤습니다.
(1) 무례하고 고압적인 태도 일삼는 하위법관 실태
2023년 서울지방변호사회가 진행한 법관 평가에서 20명의 판사가 ‘하위법관’에 선정됐습니다. 서울지방변호사회가 공개한 하위법관의 유형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습니다. 공정한 재판을 할 것이라고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면면이에요.
▲당사자, 소송관계자에 대한 고압적 언행을 하는 판사 ▲당사자가 동의하지 않는 조정을 강권하는 판사 ▲피고인 최후 진술 기회마저 박탈하는 판사 ▲예의 없는 언행으로 망신을 주거나 모욕하는 판사 ▲예단과 선입견을 드러내는 판사 ▲이유 없이 소송절차를 지연하는 판사 ▲일방에 대해 불공평한 재판 진행하는 판사 ▲충분한 변론기회, 입증기회를 제공하지 않는 판사 ▲불합리한 대기시간, 재판시간 지연하는 판사 ▲독단적이고 불합리한 소송지휘를 하는 판사
(2) 연간 4000건의 판결문 오류
2019~2023년까지 최근 5년간 민·형사 판결 경정 신청 현황을 살펴본 결과, 민사 판결은 매년 약 4000건의 판결 오류 수정이 접수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와중에 법원이 수정 신청을 받아들이는 인용률은 2019년 75.47%에서 2023년 68.79%로 하락했어요.
판결 경정이란 판결 내용을 실질적으로 변경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잘못된 계산이나 기재 등을 바로잡는 것을 뜻합니다. 쉽게 말해 단순 오류를 바로잡는 일인데, 법조계에서는 이런 오류가 쌓여 판결의 핵심 내용을 수정해야 하는 사례가 늘어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서면상의 ‘실수’가 부실 재판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거예요. 부실 재판이 상습화할수록 재판 당사자에게 치명적인 물적ㆍ정신적 손실을 입힐 위험도 높아질 수밖에 없죠.
국민 10명 중 5명 “법원 재판 신뢰 안 해”
흐려진 공정성과 객관성에 법원을 향한 국민의 신뢰도 낮아진 지 오래입니다. 한 여론조사 전문기관이2022년 국민 1000명을 대상으로 법원 판결에 관한 신뢰도를 묻는 설문조사를 진행했는데, 응답자의 56.1%가 ‘판결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했어요.
국민 10명 중 5명은 법원의 판결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출처: 쿠키뉴스
해외 국가와 비교해도 법원과 사법시스템을 향한 우리 국민의 불신은 매우 높습니다. 2023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법원ㆍ사법시스템 신뢰도’는 49.1%로 OECD 평균(56.9%)을 한참 밑돌았습니다.
오죽하면 ‘판사 소환제’ 이야기가 나올까
급기야 시민사회 일부에서는 국민이 투표로 부실 재판을 일삼는 판사를 해임하는 ‘판사 소환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어요. 실제 사례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2019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시민들은 주민투표를 통해 판사 애런 퍼스키를 해임했습니다. 퍼스키는 만취 여성을 성폭행한 수영 선수 브록 터너에게 징역 6개월이라는 솜방망이 처벌을 내려 논란을 일으킨 인물이었어요. 시민들은 터너가 전미 고교 수영 챔피언 출신의 명문대생이자 백인 스타 운동선수라서 지나치게 관대한 처벌을 받았다고 반발하며 잘못된 판결을 내린 법관을 직접 끌어내렸죠.
인간 판사보다 AI 판사 선택하겠다는 국민… 법원은 쇄신 의지 있을까
재판 소식을 전하는 포털 뉴스의 댓글을 보다 보면 종종 이런 말들을 마주하곤 합니다. “이제 인공지능이 대세인데 제일 먼저 법원에 도입해야 한다” “AI 판사가 차라리 공정하겠다”. 괜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2020년 법원 관련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 10명 중 5명은 ‘인간 판사’ 대신 ‘AI 판사’를 선택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거든요.
'인간 판사'의 대체자로 'AI 판사'를 선택하겠다는 사람들. 출처: 한국리서치
법원은 1895년 ‘재판소 구성법’ 제정 이후 129년의 역사 속에서 국가와 국민의 안전을 도모하는사법 심판의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런 법원에 “AI가 더 믿음이 간다”는 말은 모욕이나 다름없을 거예요. 그러나 바닥을 기는 국민 신뢰도에도 법원의 체질 개선은 요원해 보입니다. 국민이 납득하고 신뢰할 만한 판결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재정비한다는 개선 방안조차 없어 보여요. 법원이 먼저 개혁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면, 멀게만 느껴졌던 판사 소환제와 AI 판사는 어느덧 눈앞의 현실로 다가와 있을지 모릅니다. “법을 위해 인간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법이 존재한다”는 격언을 이제는 국민이 아닌 법원이 되새길 때입니다.
참고문헌
경향신문. 24–06-26. [“이 판결 틀렸어요” 민사 판결문 수정 요청 연간 4000건··· 수용률은 ‘하락’].
중앙일보. 24–03-06. [[단독] 두 달 새 25건 "무죄" "무죄" "무죄"··· 성범죄 판결이 달라진다 [천대엽 판결 후폭풍]]. 한겨레. 24–01-30. [가해자 볼까 공포, 수사기록 열람 어려워··· 재판도 힘겨운 ‘미투’].
로리더. 24–01-11. [하위법관 실태··· 고압적, 망신 주는 판사, 부실한 판결문].
연합뉴스. 23–10-02. [한국 의회·사법시스템 신뢰도 저조··· OECD 하위권].
쿠키뉴스. 22–11-30. [국민에게 신뢰 잃은 사법·수사기관··· ‘과반’이 부정적 [쿠키뉴스 여론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