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고도, 가의도, 슬도, 득량도, 수우도… 우리나라 곳곳에 위치한 이 섬들 사이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한국전력의 발전시설이 들어선 지역이란 점입니다. 한전은 지난 30여년간 전국 66개 섬마을에 발전소를 두고 전기를 공급해왔습니다. 각 섬에는 발전운전원·정비원·사무원 등이 배치되는데, 큰 섬은 20~30명 규모의 인력이 있지만 작은 섬은 적게는 3~4명의 인원이 시설 운영을 도맡고 있었죠. 그런데 올해 이들 도서발전소에서 노동자들이 대거 해고를 당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섬마을 불 밝혀온 한전의 하청 노동자들
지난 8월 한전 도서발전소에서 운영·정비 업무를 해왔던 노동자 184명이 해고 통보를 받았습니다. 한전의 도서지역 전력공급 사업을 위탁 받은 하청업체 JBC 측은 “한전의 위탁계약 종료로 인해 도서전력사업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됐다”며 해고 이유를 밝혔습니다. 그런데 여기엔 복잡한 사연이 얽혀 있습니다.
1990년대 초부터 한전은 도서지역의 자가발전시설을 인수해 전력 사업을 운영해왔습니다. 그러나 도서지역의 특성상 발전소에서 오래 일할 직원을 찾기가 좀처럼 쉽지 않았죠. 한전은 묘수를 떠올렸습니다. 현지 주민을 포함한 인력을 상당수 확보하고 있었던 민간업체 JBC에 발전소 업무를 위탁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때부터 한전의 도서지역 발전소 업무를 하청 노동자들이 담당하게 됐죠.
한전 도서발전소 노동자들은 한전 본사의 직접적인 업무 지시를 받아왔다. 출처: FREEPIK
한전 직원이지만 한전 직원이 아닌 도서발전소 노동자? 알고 보니 ‘불법파견’
그런데 한전의 업무 위탁 방식을 뜯어보니 ‘묘한’ 구석이 있었습니다. 한전은 수십여 종에 달하는 업무처리지침을 마련해 하청 노동자들의 업무 매뉴얼과 근무 방식을 구체화했습니다. 노동자들에게 이메일과 카카오톡 메시지, 유선 연락 등 다양한 경로로 업무 관련 지시도 내렸고요. 하청 노동자들은 한전 직원들과 함께 ‘부대 업무’를 하기도 했습니다. 해마다 홍보용 조끼와 안전띠를 착용하고 한전 직원들과 공동작업 형태로 도서지역 주민을 돕기 위한 봉사활동에 나섰죠. 자, 이쯤 되면 독자 여러분의 머릿속에도 이런 생각이 떠오를 겁니다. “도서발전소 노동자들, 소속만 JBC일 뿐 사실상 한전 직원인 것 아닌가?”
법원의 판단도 여러분의 생각과 같았습니다. 지난해 6월 광주지법은 JBC 노동들이 한전을 상대로 제기한 근로자지위 확인소송에서 하청 노동자가 한전 소속 근로자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재판부는 “한전이 하청 노동자들에게 상당한 지휘·명령을 하면서 이들을 자신의 사업에 실질적으로 편입시켰다”면서 “반면 JBC가 소속 노동자들의 전반적인 노무 관리에 관한 결정 권한을 독자적으로 행사하거나, 용약계약 목적 달성에 필요한 독립적 기업조직이나 설비를 갖추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습니다. 이로써 한전이 JBC를 통해 불법적으로 노동자를 파견 받았다는 사실이 확인됐죠.
법원의 판결에도 한전은 도서발전소 노동자들의 직접고용을 거부하고 있다. 출처: 전국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조
직접 고용 거부하고 ‘자회사’ 카드 꺼낸 한전, 그런데 말입니다…
법원은 파견근로자보호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한전이 하청 노동자들에게 ‘직접고용’을 보장할 것을 주문했습니다. 그러나 한전은 항소를 제기한 뒤 도서발전 업무를 JBC가 아닌 한전의 검침 자회사 ‘한전MCS’에 위탁하기로 했습니다. JBC 노동자들을 직접고용 하는 대신 자회사 직원으로 전환하려고 하는 것이죠.
더구나 이 방법엔 한전의 ‘꼼수’도 들어 있습니다. 한전MCS로 전적하려면 근로자지위확인소송 취하서와 향후 소송을 제기하지 않겠다는 확약서에 서명을 해야 했습니다. 노동자들은 소송 취하 없이 자회사로 소속 전환을 하겠다고 역제안했지만 한전은 수용하지 않았어요. 결국 600명가량의 노동자 중 184명은 소 취하서와 부제소 확약서 서명을 거부했습니다. 이후 한전이 JBC와의 계약을 종료하면서, 184명의 노동자는 해고 통보를 받고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되어버렸죠.
파도 파도 괴담뿐… 불법 조장하는 공기업 한전과 퇴피아의 온상 JBC
한전이 직접고용을 회피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저비용 고효율’을 위해서입니다. 정규직 근로자에 비해 임금 수준이 낮은 하청 업체 노동자를 통해 각종 인건비와 관리비를 최소화하려는 심산입니다. 한편에서는 이번 대량 해고 사태가 한전 내부에 만연한 ‘퇴직자 커넥션’과 무관하지 않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옵니다. JBC는 한전 퇴직자들이 모인 친목단체 ‘한국전력전우회’가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는 회사입니다. 전·현직 임원도 한전 퇴직자들이 차지하고 있죠.
한전은 수의계약을 통해 JBC에 도서발전소 용역 업무를 위탁하고 있다.
출처: FREEPIK
한전은 지난 30여년간 도서발전소 업무 위탁 건으로 JBC와 수의계약을 맺어왔습니다. 그러니 한전과 JBC 입장에서 이번 대량 해고 사태는 커다란 변수입니다. 만약 한전이 노동자들을 직접 고용한다면 JBC의 ‘일감’이 사라지는 격입니다. 2010~2018년까지 9년간 JBC의 매출에서 한전 용역이 차지한 비중은 73%에 달했습니다. 전기 공급 사업은 낮은 판매 단가로 인해 수익을 내기 어려운 분야로 꼽힙니다.
이러한 산업 환경을 감안하면, JBC가 한전과 계약 없이 독자 생존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JBC가 존속하기 위해선 한전이란 든든한 뒷배가 필수적입니다. 한전의 역시 비용효율화 뿐만 아니라 미래 퇴직 후 ‘자리 보전’을 위해서라도 JBC가 필요하고요. 한전이 도서발전소 노동자들의 직고용을 거부하는 배경에는 이런 이해관계가 작용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죠.
한전과 JBC가 그들만의 리그를 꾸리는 동안 도서발전소의 발전은 가로막혔습니다. 노동자들은 안전을 담보로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분투하고 있고요. 한전의 불법파견이 어떤 부작용을 만들어내는지, 왜 직접고용이 필요한 것인지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며 이번주 레터를 마칩니다.
비가 오면 발전소에 비가 샙니다. 바닥이 흥건하게 젖을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JBC는 보수에 나서지 않습니다. 발전소 소장님도, 본사 측에서도 ‘한전의 승인이 떨어져야 보수공사를 할 수 있다’는 말만 되풀이합니다. 소방과 관련된 문제도 매년 보고하는데, 아직까지 반응이 없어요.민간위탁이 되면서 업무 효율성뿐 아니라 안전도 취약해진 겁니다.
65개 사업소에서 매년 72명 정도의 신입직원들을 뽑는데, 계속 그만두고 나갑니다. 근무조건이 열악한 섬에서 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전의 발전소에서 일한다고 해서 왔는데, 막상 와보니 JBC라는 용역회사 소속에, 급여도 한전보다 적고, 복지혜택도 없으니까요. 고용이 보장되는 한전에서 직접 발전소를 운영한다고 하면, 더 능력 있는 인력들이 입사하지 않을까요?
지금 한전에서 저희를 직접 고용한다고 해서 문제될 게 전혀 없는 이유가 뭐냐면요. 자산도 한전 거고요, 설비 모두 한전 거고요, 저희 운영하는 운영기금이 전력기반기금, 즉 국민 세금으로 인해서 운영되고 있는 거고요. 오히려 저희가 한전으로 인수가 되면 JBC에 해마다 주는 30~40억의 이익금 같은 것을 아낄 수 있어요. JBC가 과거 지자체에서 일하던 직원들을 고용승계 했듯이, 한전에서 저희 인력을 그대로 고용하면 섬발전소 운영에 전혀 문제될 게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