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총선에서 나왔던 공약 중 '철도 지하화' 기억 하시나요? 여야를 가리지 않고 외쳤던 공약인데요, 사실 20년 넘게 선거철마다 등장했던 레퍼토리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진짜로 추진되나봐요. 국토교통부는 다음달에 각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철도 지하화 사업 제안을 받고, 올해 안으로 1차 선도 사업 대상 지역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철도 지하화를 추진하는 이유는 철도 인근 지역 주민들을 위해서래요. 철도라는 교통망 덕분에 지역이 발전한 측면도 있지만, 도시가 팽창하고 철로 인근까지 주거지역이 확장되면서 주민들이 소음과 분진 등의 피해를 겪게 됐대요. 지상에 설치된 철로 때문에 도심의 생활권이 단절되기도 하고요. 철도를 지하로 넣으면 이러한 불편이 사라지고 철도가 들어서 있던 땅을 개발할 수 있겠죠. 그래서 지역구 정치인들 뿐만 아니라 주민들도 서명운동에 참여하고, 지상 철도가 지나가는 전국의 지자체들이 철도 지하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어요.
철도가 지하로? 좋을 것 같긴 한데… 문제는요
그런데 철도 지하화 사업에는 큰 문제가 있습니다. 막대한 비용이 든다는 점인데요, 서울시 내의 국가철도 구간을 지하화 한다면 약 32조원 이상이 소요될 것으로 추정돼요. 부산시와 대구시의 지하화 사업도 각각 8조원 이상이 들 거라고 하고요, 전국적인 철도 지하화에는 70~80조원의 사업비가 필요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나랏돈을 크게 쓰는 일인만큼, 비용 대비 편익과 공공성을 따져 봐야겠죠.
윤석열 대통령은 철도 지하화 사업의 재원을 조달할 방법에 대해 “현 철도부지, 도로부지를 현물출자하여 민간 투자를 받아 자금을 마련하겠다”고 설명했어요. 민간은 나중에 부지 개발이 완료된 후 투자금과 이익을 회수하고요. 지난 2월 국토부는 일단 사업비 중 50조원가량을 공사채(공공기관 채권)로 조달할 계획이라고 밝힌 상태예요.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대규모 재원을 마련하면 부실화 위험이 있어요. 특히 재정여력이 열악한 지자체는 더욱 우려가 커요. 철도 지하화를 완료하고, 기존 철도 부지를 매각하고 공원이나 상권을 조성해 수익을 내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 텐데 이자부담을 감내할 수 있을 지 걱정된다는 거죠. 지상 부지의 사업성이 크지 않은 경우 이익을 빨리 회수하지 못할 수도 있고요.
출처: 국토부
원주민 희생양되는 ‘젠트리피케이션’ 발생한다
사업성이 있는 부지라 해도 문제가 있어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일어날 수 있거든요. 철도는 선형으로 깔려 있으니까 그 부지만 개발하면 활용에 한계가 있어요. 개발이익을 높이려면 인접 도심지까지 묶어 통합개발을 해야 해요. 이 과정에서 누군가는 땅값이 올라 이익을 챙길 수 있겠지만 원주민들이 그 지역에서 밀려나게 돼요. 서울의 경우 지상 철도가 다니는 곳은 역에 가까우면서도 임대료가 상대적으로 저렴한데, 토지 가치가 올라 임대료가 오르면 세입자들은 살 수가 없게 돼요. 대규모 개발로 인해 민간 자본은 이익을 챙긴 반면 원주민이 희생양이 된 사례는 이미 많잖아요. 서울 마포구에 ‘경의선 숲길’이 개발된 이후에도 주변 임대료가 폭등해 원주민들이 쫓겨나는 젠트리피케이션이 나타났어요. 물론 땅을 가진 지주들은 이익을 봤죠.
사업비 막대한 만큼 임대료 폭등 우려 커
지금 추진되는 철도 지하화는 기존에 지상으로 지나다니던 열차 운행을 정상적으로 지속하면서, 지하에 대체 선로를 깔아야 하기 때문에 사업비가 많이 들고 공사 기간이 오래 걸려요. 우리가 평소 타고 다니는 지하철보다 깊이가 2~3배 정도 깊은 지하 50m 가까이 선로를 깔기 때문에 km당 1500~4500억원이 들어간대요. 막대한 비용이 들어간 만큼 개발이익을 많이 남겨야 할 테니, 이전의 철도역 개발사례들 보다 임대료 폭등 문제가 더 크게 걱정됩니다. 지하철 운임 인상 압력이 높아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요.
철도 지하화를 통해 땅주인이나 민간 자본이 이익을 볼 수 있는 반면, 대다수 철도 이용객들의 불편은 오히려 증가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위에서 이야기했듯, 굉장히 깊은 땅속으로 열차가 지나가도록 만들기 때문에 환승할 때 시간이 훨씬 오래 소요될 것으로 예측돼요. 평소 자주 봐왔던 에스컬레이터 앞 ‘점검중’ 표지판이 환승구간이 길고, 계단이 매우 많은 곳에 세워져 있다면 절망적이겠죠? 금정역을 지하 40m 아래로 연결해 초고속 철도가 지나가도록 했을 때 이용객들의 추가 이동시간과 그로 인한 숨은 비용이 얼마인지 계산해보니 최소 5조원의 손실이 발생한다는 분석도 있었어요.
공공교통 인프라 확충보다 ‘개발사업’이 먼저?
철도 지하화는 ‘우선순위’ 문제에서도 논란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미 지상으로 다니고 있는 철도를 지하로 넣는 것보다, 철도가 들어서지 않은 지역의 교통망을 연결하거나 출퇴근길 수요가 몰리는 대중교통에 투자해 공공교통의 질을 높이려는 정책이 더 시급하잖아요. 철도 지하화로 인해 누가 이득을 보게 되는지 따져보고, ‘개발특수’가 아닌 공공성의 관점에서 철도 지하화 사업을 재검토해야 합니다.